송태섭은 화가 났다.
아 왜 자꾸 이런 장면이랑 맞딱드리는건데?! 송태섭은 원망스러운듯 한 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손에 들고있는 쓰레기통을 내팽개치고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마음보다 더,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결말을 알고싶다는 욕구가 훨씬 앞섰다.
건물 모퉁이에 숨어있는(?) 송태섭의 시선 끝에는 같은 농구부의 한 살 위 선배가 누군가와 마주보고 서있었다. 분위기가 딱 누가봐도 고백 장면이었다.
상대방은 남학생이었다. 성별이 남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우연히 목격한 정대만의 고백받는 씬들 중 70%가 남자였으니. 고백받는 당사자도 그런 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고.
안경을 쓰고 깨끗하고 단정한 스타일에 키는 송태섭보다 큰 듯 보였다. 젠장 하고 태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전체적으로 우등생의 분위기가 폴폴 풍기는 것이 어딘가 준호선배와 비슷한 분위기의 남학생이었다.
저번에 봤던 고백씬의 상대는 건장한 야구부 부원이었다. 그 전에는 좀 놀거 같이 생긴 여학생이었고 그전에는.. 태섭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관뒀다. 완전 인간 자석.저 인간 사주 보면 도화살만 잔뜩 껴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태섭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다시 눈 앞의 장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남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정대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백의 대사를 늘어놨다. 정대만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각도상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자 잠깐의 틈을 두고 대만이 입을 열었다. 이 순간만 되면 늘 태섭의 맥박수는 인생 최대치를 찍었다.
[마음은 정말 고맙다. 그런데 나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마음 못 받아줘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상대방의 장점을 추켜세워 너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니 분명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거라는 격려에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같은 관계 유지 하고 싶은데 만약 니가 원하지 않으면 가능한한 피하겠다는 배려까지, 세상에 고백을 거절하는 모든 이들에게 메뉴얼 만들어서 돌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언제나 깔끔하고 완벽하다.
상대방은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되레 그랬구나, 부담줘서 미안하다며
[앞으로도 뭐 모르는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그리고 누굴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응원할게!]
라고 개운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고는 손까지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정대만도 [어 그래. 고맙다] 같이 손을 흔들며 그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이게 고백을 차인자와 걷어찬 자의 모습이라니 백호가 알면 뒤로 넘어갈 노릇이다. 그저 정말 대단한 남자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송태섭은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대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길래 저렇게 다 뻥뻥 차고 다니는거지?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평소 정대만의 생활 패턴을 봐서는 누군가와 사귀고 있는것 같지도 않았다. 평일에는 늦게까지 농구 연습을 하고 하굣길은 방향이 같은 태섭과 거의 같이였다. 주말에도 종종 1on1하자든가 뭐 살거 있는데 같이 가자 든가 그런 전화가 오곤 했으니. 가끔 태웅이랑도 주말에 1on1을 하는것 같았고. 아니면 단순히 고백을 거절하기위한 핑계란 가능성도 있지만 글쎄, 송태섭이 아는 한 정대만은 그리 거짓말이 능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 정대만이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는건가? 저 강력한 인간 자석을 안통하는 인간이 있다면 한 번 보고 싶었다.
상대방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는 정대만을 태섭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송태섭은 정대만을 짝사랑하고 있다.
그 지경으로 서로 피터지게 치고 박고 이까지 날려먹고 했던 상대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태섭은 단전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무거운 한숨을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내뱉았다. 여기에 이름을 갖다 붙이자면..그래, 첫사랑의 저주 같은거다. 그 날 옥상에서 그 길었던 첫사랑은 산산조각으로 박살나서 눈과 함께 녹아없어졌을터였건만 어딘가에 달라붙어 숨어있던 잔해가 어느샌가 슬금슬금 기어나와 심장에 콕 박혀버렸다. 정대만과 함께 코트에서 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그의 손에서 떠난 농구공이 거침없이 링을 통과할 때마다, 그 잔해는 더 깊숙이 박혀들어가 정신차려보니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체력이 고갈되어서 코트 위에서 비척이며 헐떡이는 모습마저 예뻐보일 지경이니 단단히 미쳤지 미쳤어. 누군가를 좋아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인다더니 큐피트의 화살을 눈깔에 쳐맞았나보다.
[어이 송태섭. 숨어있지 말고 이제 나오시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게워내고 있는데 별안간 커다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송태섭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쓰레기통을 엎을뻔 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씨 어떻게 알았지. 이런 눈치는 빨라가지고. 멋쩍어서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천천히 정대만에게로 다가갔다. 대만은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이 눈이 부셔서 태섭은 시선을 살짝 비꼈다.
[나 있는거 알고 있었어요?]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요 전에도 그 전에도 있었잖아]
순간 크게 뜬 눈으로 정대만의 눈을 쳐다봤다가 바로 얼굴을 돌렸다. 뭔가 몰래 나쁜짓 했던걸 들킨 것 마냥 민망했다. 괜히 실내화 끝으로 바닥을 찼다.
[...알고 있었으면 장소를 좀 다른데로 옮기지 그래요]
[하하 그건 내 맘이고]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슬쩍 노려보니 여전히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건지 생글생글. 뭐 고백받은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일이 없긴 한가? 아직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는 송태섭은 알 길이 없었다.
고백을 몰래 훔쳐보던 것도 다 들킨 마당에 궁금한거라도 물어보자는 심산으로
[형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툭 내뱉듯 물었다. 예상치못한 질문이었는지 대만은 아무말 없이 태섭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크게 두번 깜빡였다.
[니가 알아서 뭐하게?]
[그냥요. 궁금해서]
진짜 궁금한건 맞으니까.
[어, 있어]
짧고 간결하고 명확한 대답이었다. 태섭의 눈을 바라보는 대만의 눈빛은 또렷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잔해가 달그락 거리며 심장을 긁어 생채기를 만들어간다. 아프다.
그게 누군데요? 라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씹어삼켰다. 듣고 싶지만 듣기싫었다. 정확히는 무서웠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듯 흐응 그렇구나.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소각장까지 이 엉아가 같이 가주마!]
태섭의 목에 팔을 둘러오며 장난스레 무슨 선심쓰듯 말했다. 아 뭐래는거야. 팔을 내치려고 했지만 대만이 팔에 힘을 주어 버텼다. 희미하게 땀냄새가 섞인 섬유유연제의 상쾌한 향기가 태섭의 후각을 쓰다듬었다.
[쫌 가만 있어봐~ 태섭이 너 피부가 차가워서 이런 날 안고 있기 딱 좋단 말이야]
[사람을 멋대로 죽부인 취급하지 마시죠? 난 덥다고요.]
진짜 덥다.
맞닿은 살갗이 뜨겁다고 느끼는 것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분명 다 이 빌어먹을 더운 날씨 때문이다. 라고 책임 전가를 하며.
날뛰려는 심장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속으로 구구단을 외면서 진정 시키느라 머리에서 김이 날 것 같다.
너무 덥다.
〇●〇●〇
『초등학생?』
그게 첫 만남이었다.
준섭형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송태섭의 농구를 봐주었던 사람.
짧은 1on1에서 준섭형과 겹쳐보였던 사람.
당황해서 말 없이 돌아가려는 태섭에게 또 보자고 해준 사람.
그 날 이후에도 그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다가 딱 한 번 더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아니 만났다기보다는 길가다가 그가 친구들과 농구를 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눈에 띄기 싫어서 입고 있던 후드티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그늘진 곳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무척 즐거워보였다. 플레이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정말 태양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뭣도 모르고 함부로 쳐다보았다간 눈이 타들어가버릴정도로 강렬한. 송태섭 자신과는 정말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가 살짝 뒷걸음을 치며 뛰어올랐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농구공을 쏴 올리는 유연한 손목의 움직임부터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농구공까지 일련의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송태섭의 머릿속에 각인 되었다. 그 나이 되어서 처음으로 '아름답다' 라는 형용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된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철조망을 움켜쥐고 넋놓고 쳐다보았다. 농구공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냅다 뛰었다. 심장도 함께 쿵쿵 뛰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틈만 나면 그가 떠올랐고 그 때마다 심장이 팔딱거렸다. 어린 마음에 혹시 심장에 병이 있는게 아닐까 남몰래 걱정도 했다.
그 걱정은 한참 후에 해결 되었다. 같은 반에서 친해진 달재에게 슬쩍 물어보니 깜짝 놀라며 『태섭아 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니?』라는 대답에 태섭은 더 놀랐다. 좋아하는 사람...속으로 되뇌이자 또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 날 처음으로 몽정이란 걸 했다. 심장병 걱정(?)이 해결되고 나니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〇●〇●〇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저 인간 자석의 희생자였어! 아니다 최대 피해자 아닌가? 뜬금없이 떠오른 과거의 주마등에 발끈하여 송태섭은 칫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분노의 양치질을 했다.
한여름이어도 새벽은 좀 선선한 편이었다.
아침에 눈이 일찍 떠진 김에 후딱 준비해서 일찍 집을 나섰다. 아직 밤의 장막이 채 다 걷히지 않은 길을 걸었다. 평소 역으로 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윽고 철제 펜스가 둘러쳐진 농구 코트가 나타났다. 걸음을 멈추고 철조망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 때와 같은 위치 다른 높이. 철조망 너머 코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슛을 쏘는 정대만의 모습이 그려진다. 동작 하나하나가 아주 선명하게. 어렸을 적 기억과 다른 점이라면 슛을 성공한 정대만은 송태섭을 보며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가슴을 부딪혀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이 철조망 밖에 서있는데.
태섭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 때처럼 냅다 달려서 도망칠 것인지. 이 철조망을 끊어버리고 저 코트로 달려들어갈 것인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스스로가 감당해야한다는 것을 송태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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