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이가 많이 웁니다. 주의!



정대만의 다섯번째 고백 거절 장면을 목격했을 때 송태섭은 자신의 첫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저정도로 단호하게 좋아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잖아. 송태섭은 자신의 첫사랑도 그 대전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뿐이라 생각했다. 단지 좀 길었을 뿐.
게다가 그렇다고해서 정대만을 향한 마음이 사라진 것도 약해진 것도 아니라는 것 역시 금세 깨달았다. 옥상에서 깨지고 학교 뒷뜰에서 가루가 된 첫사랑은 그냥 짝사랑으로, 그것을 정의하는 단어의 앞글자가 하나 바뀌었을 뿐이었고 정대만 때문에 심장이 팔딱일 때 느꼈던 달달한 아픔이 카카오 80% 함유 초콜릿 같은 씁쓸한 통증으로 바뀐 정도였다. 그 쓰디쓴 초콜릿도 계속 먹다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극소량의 달콤함을 기어이 찾아내서 거기에 집착하고 스스로를 중독시켜버린다. 실제 카카오80 초콜릿은 몸에라도 좋지, 이건 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정대만은 거리감 버그가 있는 인간이라 더 질이 나쁘다. 짝사랑 앞에 '망한' 이란 수식어를 갖다붙이며 송태섭은 깊디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송태섭~ 야~~거기 앞에 가는 태섭아~~]

지금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태섭의 뒷통수를 후렸다. 환청인가 하고 그냥 지나가기엔, 아직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드문드문한 등교길에 쩌렁쩌렁 울릴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야생의) 정대만이 나타났다!
▶싸우기
▶대화하기
▶도망가기
얼마 전 했던 게임 장면이 떠올랐다.
마음같아선 세번째 선택지를 마구 연타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도망간 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부실이나 체육관에서 다시 조우하게 될 것을. 결국은 '대화하기' 밖에 없잖아.
평소보다 일찍 나왔건만 하필 저 인간도 일찍 나올건 뭐람. 속으로 투덜대며 하늘을 한 번 슬쩍 노려보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았다. 
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뒤에 그가 우뚝 서 있어서 태섭은 저도 모르게 흠칫 했다. 

[일찍 왔네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척 올려다보며 인사를 건냈다. 아아 오늘도 이 사람은 반짝반짝 눈부시다. 화창한 날 초록 잎사귀 사이로 비쳐드는 맑은 햇살같은. 뭐가 그리 좋은지 이런 이른 아침부터 싱글벙글. 오전에는 대체적으로 저기압에 가까운  태섭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텐션이었다.  
정대만은 엉 이상하게 아침에 눈이 빨리 떠져서 말야. 라며 기지개를 쭉 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간다. 길게 쭉 뻗은 팔다리에 작은 머리로 이루어진 프로모션은 극상이었고 운동까지 해서 군더더기 없이 잘 빠진 라인에 저 얼굴에 그 머리결까지. 하느님도 참 정성들여 빚어내셨구나. 저도 좀 신경써주시지 그랬어요!
정대만 찬양인지 불만인지 알 수 없는 사설을 속으로 늘어놓는 동안 계속 정대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송태섭은 똑같이 자기를 빤히 응시하는 대만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채고 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흘렸다. 뜨거워진 귓볼을 피어스를 만지는 척 손으로 가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서 가요. 연습해야죠]
[응. 참, 야 어제 티비에서 NBA하이라이트 보여주는거 봤냐?]

정대만이 옆에 바싹 따라붙어서 잡담을 늘어놓았다. 정대만과의 이런 일상 대화는 즐거웠다. 서로 공통 화제도 잘 맞고 개그 코드도 비슷했다. 하지만 동시에 괴로웠다. 옷섶에서 풍겨오는 섬유유연제의 향기라든가 옆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체온이,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고 이성을 마구 흔들어댄다.
태섭은 적당히 대꾸하며 주머니속에 찔러넣은 손을 꾸욱 말아쥐었다. 오늘도 덥다.



정대만의 사물함은 태섭의 바로 옆이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게다가 오늘은 일찍 온 탓에 부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망했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교복을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가자싶어 태섭은 서둘러 사물함을 열었다. 교복 셔츠 단추를 푸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자꾸 손가락이 꼬인다.
정대만도 옆에 서서 교복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옆에서 들려오는 사락사락 옷자락 소리에 저도모르게 돌아가려는 고개를 애써 정면에 고정시켰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는데 유난히 꿀꺽하는 소리가 크게 느껴져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은 뭔가 좀 이상했다. 점점 들썩이는 심장 박동이 위험 신호처럼 느껴졌다. 어서 여기서 나가자.
하지만 교복셔츠를 벗고 반팔티에 머리를 끼워넣으며 무심결에 흘린 시선 끝에 작고 발그레한 핑크빛의 그것이 걸렸다. 순간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온 몸이 심장이라도 된 것 마냥 거세게 쿵쾅거렸다. 아랫쪽에 피가 몰리는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미친 위험하다. 태섭은 앞뒤 생각할 겨를없이 사물함 테두리에 냅다 이마를 쾅 박았다. 격통에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난 소리에 놀란 정대만이 또 이마를 박으려는 태섭의 몸을 다급히 돌려세웠다.

[야  송태섭 너 갑자기 왜그래??!]

태섭의 빨개진 이마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건들지마!!]

대만의 손을 뿌리쳤다.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버렸다. 내쳐진 반동으로 대만의 팔이 튕겨 캐비넷 문 모서리에 싹 긁혀서 빨간 생채기가 생긴 것이 보여 잠시 멈칫했지만 거기에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송태섭은 아무말 없이 바로 부실 밖으로 뛰쳐나와 복도를 있는 힘껏 달려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칸 문을 걸어잠그고 턱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고르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 곳은 묵직했고 바지 앞섶의 볼륨감이 평소와 퍽 다르다. 아니 와 진짜 돌았냐고, 송태섭 너 이새끼야?!?! 속으로 온갓 욕짓거리를 자신에게 퍼부으며 변기 뚜껑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자신이 정대만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꿈에도 이미 여러번 등장했다. 그런 꿈 있잖아 그런 꿈.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몸에 반응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실화냐. 혹시 이것도 꿈이 아닐까? 머리카락을 쥐뜯어보니 아프다. 꿈은 아니네. 가망도 없는 상대에게 욕정해서 어쩌자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좀 울고 싶어졌다.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이놈을 여기 앉아 뺄수도 없는 노릇이고ㅡ그러긴 죽어도 싫었다ㅡ진정될 때까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채 한숨을 푹푹 쉬며 속으로 조선왕조 계보를 반복해서 읊었다. 
고집스러운 녀석이 좀 진정이 되자 그제서야 이마의 통증과 함께 슬그머니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정대만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보지 못했다. 날 위하고자 한 행동을 갑자기 그런식으로 쳐냈으니 황당했겠지. 화났으려나. 팔에 상처 괜찮으려나? 얼핏 봐선 그리 깊어보이진 않았는데. 약은 제대로 발랐으려나. 정대만 그런 부분 꽤 대충 대충 넘어가는 편인데. 의문과 걱정이 서로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정대만도 신경쓰이고 옷도 갈아입다 뛰쳐나온터라 일단 일어나서 부실로 향했다.
부실에는 그새 등교한 다른 부원들이 몇 있을 뿐 정대만은 없었다. 부원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후딱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거기에도 없었다. 보건실에 간건가. 이 시간에 보건실 문이 열려있나? 가볼까? 보면 뭐라고 해야하지? 일단 사과부터하고...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최치수가 체육관으로 들어왔고 아침 연습이 시작되어버렸다. 정대만의 소재가 무척 신경쓰였지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연습에 집중했다.
연습 시작 후 30분쯤 지나서야 정대만이 모습을 나타냈다. 뭐라 한마디 하려던 최치수는 그의 팔에 감겨있는 붕대를 보고 준호에게 시선을 보냈고 준호가 대만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태섭은 농구공을 든 채 뒤늦게 나타난 정대만을 쳐다보았다. 팔에 깔끔하게 감겨있는 붕대를 보니 보건실에 갔다온 모양이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왔다. 역시 얘기하고 가볼걸 그랬나. 태섭의 시선을 느꼈는지 대만은 아주 잠깐 눈길을 마주쳤다가 이내 눈을 돌렸다. 찰나였지만 그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않다는 것을 눈치챈 태섭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저때문에 그런건지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가서 아까 일을 사과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날 아침 연습은 둘 다 주장의 핀잔을 들을 만큼 엉망이었다.
수업시간 내내 정대만 생각으로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정대만 걱정 반. 그리고 반은 이 버거운 첫/짝사랑의 미래. 혼자 힘들고 상처입는 것은 감내할 수 있지만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까지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이건 완전 다른 문제다.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을 끌어안고만 있다가 폭주했을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지 경험으로 학습한 당사자로서 송태섭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더더욱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감추고 갈 수 없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혀서 깨지는 수밖에. 엔딩은 이미 정해져있으니 필요한 건 각오 뿐이다.


방과 후 체육관에 가니 정대만이 있었다. 혼자 슛연습을 하는 그를 태섭은 입구에 멈춰서서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동작이었지만 어딘가 힘이 없어 보인달까 집중을 못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손을 떠난 볼은 역시 림 테두리를 맞고 튕겨나왔다. 두 번 세 번 다시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만이 한숨을 쉬면 한 손으로 팔에 감은 붕대에 손톱을 세우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오전에는 깨끗했던 붕대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농구화의 한 쪽 신발끈도 풀려있다. 저러다가 잘못 밟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안그래도 무릎도 안좋은 양반이! 그리고 팔은 왜 저지경인건데! 태섭은 미간을 찌푸린채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정대만의 손목을 낚아챘다. 갑작스런 태섭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손목을 뿌리치려했다.

[야 왜 이래.  이거 놔]
[잔말말고 따라와요]

빠져나오려고 버둥대는 정대만을 무시하고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반강제로 구석 벤치로 이끌었다.

[여기 가만 앉아 있어요]

벤치에 대만을 앉히고 가만 있으라고 못박았다. 정대만은 그런 송태섭을 한 번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쨌든 말은 들을 모양이다.
태섭은 끈이 풀린 농구화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거 다 묶으면 보건실 갔다와요. 붕대 엉망이잖아요]
[.......어]

농구화 끈 양쪽으로 잡고 움직이려던 손이 멈칫했다. 

.

언제였더라. 정대만이 농구화의 끈이 풀려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끈을 묶으려는 걸 보고 [무릎 부담 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고 체육관 구석 벤치로 데려가서 묶어준 적이 있었다. 그 날부터 끈이 풀린게 보이면 그 때마다 묶어주었다. 
어느날 여느 때처럼 풀린 신발끈을 묶어주고 있으니, 

『태섭이 넌 내 신발끈 풀린거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아냐?』

신기하다며 웃는 대만을 보고 깨달았다. 내가 그 정도로 이 사람을 눈으로 쫓았구나. 그 때 처음 심장에 꽂혀있는 첫사랑의 잔해의 존재를 느꼈다. 

『그러게요. 안테나라도 달렸나봐요』
『뭐야 그게ㅋㅋ 근데 왜 니꺼랑 매듭이 달라?』

태섭은 힐끔 자기 농구화 끈 매듭 한 번 보고 손을 멈추었다. 

『이 쪽이 형 농구화랑 잘 어울리는거 같아서요. 다시 묶어줘요?』
『아 그런거야? 그럼 그냥 하던대로 해줘~』

송태섭은 거짓말을 했다. 
왜냐면요.
이게 더 잘 풀리거든요.

.


잠시 망설이는 듯 멈칫했던 태섭의 손이 풀린 끈을 쥐고 매듭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농구화와 똑같은 매듭을.
손을 움직이며 대만에게 말을 건냈다. 

[오늘 아침 일은 미안해요]
[...됐어. 별로 아프지도 않고]

대만은 손으로 붕대를 쓸어내렸다. 얼마나 긁어댔는지 깔끔했던 붕대가 너덜너덜 해져서 까슬까슬했다. 
한 쪽 끈을 다 묶은 태섭은 끈이 풀리지 않은 쪽의 끈도 풀어 새로 묶기 시작했다.

[형]
[어?]

손을 멈추었다. 아니 손이 달달 떨려서 끈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뒷걸음질 그만 치자, 송태섭.
시선은 여전히 대만의 농구화에 고정한 채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짧게 내뱉고 오랜 시간 동안 속에 품어왔던 마음을 목소리에 실어 떠나보냈다.

[나 형 좋아해요]

긴 시간을 품어왔던 무게 치곤 정말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짧은 한마디. 위가 아리고 심장이 아플정도로 쿵쿵 거세게 뛰었다. 얼굴이 뜨겁다. 어쩔 수 없잖아.  눈 앞의 철조망을 찢고 들어갔으니 상처가 날 수 밖에.
제 3자 입장에서 봐왔던 장면의 당사자가 되어보니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피의자마냥 입안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도 이런 기분인데 지금까지 봐왔던 이들은... 그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선고는 내려오지 않았고 대신 흐트러진 숨소리와 함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의아하게 생각한 태섭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이 딱 벌어졌다. 제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정대만의 얼굴은 빨갰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간헐적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태섭은 숨이 턱 막혔다. 전혀 예상치 못 한 반응에 벙쪄있는데 밖에서 백호와 군단들이 떠들며 오는 소리가 들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안그래도 저번에 모두들 앞에서 울었던 전적이 있는데 또 후배들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는건 싫겠지. 일단 자리를 피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태섭은 대만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형 일단 따라와요]

이번에는 순순히 따라왔다. 태섭은 체육관을 나와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 부실 앞에 멈춰섰다. 하지만 부실은 언제 사람이 들락날락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 건너에 있는 비품실로 들어갔다. 지난 주에 한 번 싹 청소를 한 터라 깔끔하게 잘 정돈 되어있었다. 구석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다가 거기에 정대만을 앉혀놓고 비품실 문을 잠궜다. 후웁 숨을 한 번 내쉬고 뒤돌았다. 정대만은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훌쩍이고 있었다. 분명 정대만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는데 왜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건지 아무리 머릿속을 풀가동해봐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걸리는게 있다면 오늘 아침 일인데...태섭은 뒷머리를 북북 긁으며 대만에게 다가갔다. 마주 보고
앉아 대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에 젖어있는 얼굴은 아직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을 맞추자 슥 시선을 피해 올리브빛의 옅은 눈동자가 긴 속눈썹의 그림자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모습이 가슴에 달달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깔끔하게 차이면 이런 감정도 싹 사라져줄까?
다 훔쳐내지 못해 턱 흉터 아래로 방울져 있는 눈물 방울을 엄지 손가락으로 슥 훑었다.

[왜 갑자기 울고 그래요. 깜짝 놀랐잖아]
[너야말로 ....흑..무슨.......고....백을 그렇게 하냐....훌쩍....깜빡이도 없이 그렇게..... 훅 들어와...]
[...내가 고백한게 울 정도로 싫었어요?]

대만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답했다.

[너야 말로 나 싫어하는거 아니었냐고]
[내가 왜 형을 싫어해요]

아 역시 아침에 제대로 얘기를 했어야했다. 이제와서 후회를 해봐야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수습하는 수밖에. 라곤 하지만 그 일의 진상(?)을 입에 담으려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나도 흣  너랑 좀...흐윽.. 친해졌다 생각했었는데.... 너 요즘 나만 보면 한숨 계속 쉬고...피하려는거 같고. 흑  오늘 아침에도...히끅..흑]

정대만은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예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보는 사람 콧날까지 시큰해졌다. 눈치채고 있었구나. 하긴 아닌 것처럼보여도 꽤 섬세한 사람이니. 자기 방어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취했던 작은 행동들이 계속 상처를 주었을거라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미안해요 형.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근데 형 싫어서 그랬던건 절대 아니에요.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사과하고 달래면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일은........그게...]
[?]

눈물에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가만히 송태섭을 응시하였다. 아니...그게....그러니까....그..... 태섭이 자꾸 말을 빙빙돌리니까 잠자코 있던 정대만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하기 힘들면 그냥 안해도 돼]
[......어요...]
[응?]
[ㅅ...었어요]
[??어?]
[그..게 섰었다고요! 당신 속살보고 갑자기 서버렸다고!!! 그래서 도망 갔어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소리를 꽥 질렀다. 아 이런 시발 개쪽팔려, 미친 송태섭 너 오늘 흑역사 진짜 제대로 썼다. 정대만 이걸로 백만년은 놀려먹겠네 아악! 손도 얼굴도 목도 화끈거리다못해 끓어오르는것 같았다. 얘기해버리고 나니 개운함도 있긴 했지만 그보다도 압도적으로 쪽팔려서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얼마간의 침묵 후,

[푸..풉... 풋! 아하하하하하하]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부실에 울려퍼졌다.  쭈뼛쭈뼛 손에서 얼굴을 들어보니 정대만이 눈꼬리에 눈물 방울까지 달고 손바닥으로 벤치바닥을 치며 웃어대고 있었다.
그...그래 경멸당하는 것보다야 비웃음당하는게 백만배 낫기는 한데.. 거 너무 웃는거 아니에요?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한참을 웃어대는 정대만을 보며 송태섭의 한쪽 눈썹이 저절로 치켜올라가려고 할 쯤 대만이 두 팔을 뻗어 태섭을 덥썩 끌어안았다. 

[태섭아 너 왜이리 귀엽냐. 크큿]

은은한 체취와 함께 온기가 몸을 감쌌다. 원래도 정대만은 체온이 높은 편인데 울었다가 웃다가 했던 탓인지 더 따뜻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자율 신경 망가지면 다 당신 책임이야. 

[귀엽긴 뭐가 귀엽단거야. 팔 좀 풀어봐요. 붕대 갈아줄게요]

품에서 빠져나와 캐비넷에서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너덜거리는 붕대를 조심스레 떼어내보니 붕대 위에서 긁어댄 탓에 생채기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새삼스레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들어 상처 근처의 핏자국을 솜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미안해요. 많이 아팠을 텐데]
[괜찮다니까]

깨끗한 솜에 소독약을 묻혀 상처를 톡 두드리자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반사적으로 팔을 빼려고 하는 것을 태섭은 대만의 손목을 꼭 쥐고 놔주지 않았다.

[이거봐, 아프구만]
[시, 시끄러]
[조금만 참아요]

빠르게 소독을 하고 그 위에 연고를 조심스레 바르니 이번에는 간지럽다고 난리다. 아니 사람이.... 왜 이렇게 귀엽냐고. 짝사랑은 장렬하게 깨졌건만 콩깍지는 아직도 유효한가보다.
잘라낸 거즈를 상처에 대고 그 위로 하얀 붕대를 천천히 감았다. 테이프로 고정시켜 마무리 하고 태섭은 훅 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말해줘요]
[응?]
[고백 찰 때마다 하는 레파토리 있잖아요]
[그걸 왜...?]
[난 고백했고 형은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잖아요]

정대만은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의 태섭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래로 시선을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긴듯 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송태섭도 따라 일어났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고는 태섭과 마주보고 서서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딱 한 번만 말한다]
[네]

각오는 되어있다. 그래도 가슴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주먹을 꼭 쥐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잘되라고 응원은 못해주겠지만 지금까지처럼 지내고 싶다고 해야지. 답변을 속으로 되뇌이고 있는데,

[송태섭 나 너 좋아한다]
[네 알고 있............네???]

잠깐만요. 뭐라고요? 분명 지금 굉장히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정대만의 얼굴을 쳐다보니 목까지 빨갛게 익어있었다. 짝사랑이 오래되다보니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건가?

[자, 잠깐만! 지금 뭐라 그랬어요? 다시 한 번 말해봐요]
[싫어. 한 번만 한다고 했다]
[아씨 정대만 한 번만 더 해달라고!!]

발끈해서 벽으로 밀어붙였다. 양 손으로 벽을 짚고 안에 정대만을 가둔 상태에서 으르렁 댔다. 한 번만 더 해달라구요! 태섭은 안달이 났지만 정대만은 모른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고백인데 이렇게 흐지부지할 순 없잖아!

[혀엉, 딱 한 번만 더 해주면 안되요? 나 진짜 태어나서 처음 듣는 고백이라구요]

밀어서 안되면 당겨라.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눈만으로 올려다보며 한 손으로 대만의 티셔츠를 쥐고 살짝 당겼다. 그걸 내려다보던 정대만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더니 큰 한숨과 함께 그래 알았다 알았어. 백기를 들었다. 태섭의 앞머리를 더 흐트러트리며 

[나도 너 좋아해, 태섭아.]

발그레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길고 힘겨웠던 첫사랑과 짝사랑이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맞이 하였다. 그 대사에 그 미소는 반칙이라고 정대만.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씁쓸한 통증이 아닌 이가 녹아버릴 정도로 달콤한 열기가 온 몸에 퍼져나갔다. 눈물샘이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어 풀썩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고개를 숙인채 심호흡을 했다. 그냥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대만도 앞에 쪼그리고 앉아 태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 우냐? 키득 대면서. 발끈 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형]
[응?]

눈가의 물기를 손등으로 쓱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상체를 굽혀 얼굴을 쑥 들이밀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대만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정대만은 왜?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키스 해도 되요?]
[....발랑 까져가지고]
[그걸 이제 알았어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술을 겹쳤다. 여기까지는 본적이 있어서 했는데 이 다음은 뭘 해야할지 감이 안왔다. 언젠가 봤던 AV를 떠올리며 혀로 대만의 입술을 살살 쓰다듬으며 갈라진 틈새로 쑥 밀어넣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점
막을 핥다가 다가온 대만의 혀를 삭 쓸었다. 혀끝에 온 몸의 모든 신경이 몰린 듯 조그만 자극에도 척추를 타고 찌릿한 감각이 전신을 뒤흔든다. 정신없이 서로의 혀를 핥고 빨아댔다. 색기라든가 분위기고 나발이고 없었다. 그냥 서로 갈구하고 느끼고 싶다는 욕구 하나로 서로를 탐했다. 난잡하게 울리는 물기 어린 소리에 가쁜 숨소리가 얽혀갈 때쯤 입술이 떨어졌다. 누구껀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하게 젖은 붉은 입술을 서로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것 없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우리 둘 다 키스 존나 못해 ㅋㅋ]
[그러게ㅋㅋㅋ]

쪽 소리나게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꼭 껴안았다.
ㅡ첫사랑도 짝사랑도 첫고백도 첫키스도 다 가져갔으니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작게 속삭였다.

[진짜 좋아해요, 형]
ㅡ당신은 제가 가질거에요.






# 댐 우는거 넘 고자극.... 최애 우는거(슬퍼서든 아파서든 무서워서든 좋아서든) 보는게 취미입니다❤️

# 처음 구상은 이렇게 길지 않았는데.. 요리할 때 절대로 레시피대로 안 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맛있을거 같으면 마구잡이로 집어넣어서 결과물은 산으로 가버리는 그런거ㅠㅠ

#그런 주제에 손은 개느림🥲

# 감사합니다!



Posted by Bernar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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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섭은 화가 났다.
아 왜 자꾸 이런 장면이랑 맞딱드리는건데?! 송태섭은 원망스러운듯 한 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손에 들고있는 쓰레기통을 내팽개치고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마음보다 더,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결말을 알고싶다는 욕구가 훨씬 앞섰다.
건물 모퉁이에 숨어있는(?) 송태섭의 시선 끝에는 같은 농구부의 한 살 위 선배가 누군가와 마주보고 서있었다. 분위기가 딱 누가봐도 고백 장면이었다.
상대방은 남학생이었다. 성별이 남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우연히 목격한 정대만의 고백받는 씬들 중 70%가 남자였으니. 고백받는 당사자도 그런 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고. 
안경을 쓰고 깨끗하고 단정한 스타일에 키는 송태섭보다 큰 듯 보였다. 젠장 하고 태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전체적으로 우등생의 분위기가 폴폴 풍기는 것이 어딘가 준호선배와 비슷한 분위기의 남학생이었다.
저번에 봤던 고백씬의 상대는 건장한 야구부 부원이었다. 그 전에는 좀 놀거 같이 생긴 여학생이었고 그전에는.. 태섭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관뒀다. 완전 인간 자석.저 인간 사주 보면 도화살만 잔뜩 껴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태섭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다시 눈 앞의 장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남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정대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백의 대사를 늘어놨다. 정대만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각도상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자 잠깐의 틈을 두고 대만이 입을 열었다. 이 순간만 되면 늘 태섭의 맥박수는 인생 최대치를 찍었다.

[마음은 정말 고맙다. 그런데 나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마음 못 받아줘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상대방의 장점을 추켜세워 너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니 분명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거라는 격려에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같은 관계 유지 하고 싶은데 만약 니가 원하지 않으면 가능한한 피하겠다는 배려까지, 세상에 고백을 거절하는 모든 이들에게 메뉴얼 만들어서 돌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언제나 깔끔하고 완벽하다.
상대방은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되레 그랬구나, 부담줘서 미안하다며

[앞으로도 뭐 모르는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그리고 누굴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응원할게!]

라고 개운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고는 손까지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정대만도 [어 그래. 고맙다] 같이 손을 흔들며 그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이게 고백을 차인자와 걷어찬 자의 모습이라니 백호가 알면 뒤로 넘어갈 노릇이다. 그저 정말 대단한 남자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송태섭은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대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길래 저렇게 다 뻥뻥 차고 다니는거지?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평소 정대만의 생활 패턴을 봐서는 누군가와 사귀고 있는것 같지도 않았다. 평일에는 늦게까지 농구 연습을 하고 하굣길은 방향이 같은 태섭과 거의 같이였다. 주말에도 종종 1on1하자든가 뭐 살거 있는데 같이 가자 든가 그런 전화가 오곤 했으니. 가끔 태웅이랑도 주말에 1on1을 하는것 같았고.  아니면 단순히 고백을 거절하기위한 핑계란 가능성도 있지만 글쎄, 송태섭이 아는 한 정대만은 그리 거짓말이 능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 정대만이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는건가? 저 강력한 인간 자석을 안통하는 인간이 있다면 한 번 보고 싶었다.
상대방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는 정대만을 태섭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송태섭은 정대만을 짝사랑하고 있다. 
그 지경으로 서로 피터지게 치고 박고 이까지 날려먹고 했던 상대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태섭은 단전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무거운 한숨을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내뱉았다. 여기에 이름을 갖다 붙이자면..그래, 첫사랑의 저주 같은거다. 그 날 옥상에서 그 길었던 첫사랑은 산산조각으로 박살나서 눈과 함께 녹아없어졌을터였건만 어딘가에 달라붙어 숨어있던 잔해가 어느샌가 슬금슬금 기어나와  심장에 콕 박혀버렸다. 정대만과 함께 코트에서 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그의 손에서 떠난 농구공이 거침없이 링을 통과할 때마다, 그 잔해는 더 깊숙이 박혀들어가 정신차려보니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체력이 고갈되어서 코트 위에서 비척이며 헐떡이는 모습마저 예뻐보일  지경이니 단단히 미쳤지 미쳤어. 누군가를 좋아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인다더니 큐피트의 화살을 눈깔에 쳐맞았나보다.

[어이 송태섭. 숨어있지 말고 이제 나오시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게워내고 있는데 별안간 커다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송태섭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쓰레기통을 엎을뻔 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씨 어떻게 알았지. 이런 눈치는 빨라가지고. 멋쩍어서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천천히 정대만에게로 다가갔다. 대만은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이 눈이 부셔서 태섭은 시선을 살짝 비꼈다.

[나 있는거 알고 있었어요?]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요 전에도 그 전에도 있었잖아]

순간 크게 뜬 눈으로 정대만의 눈을 쳐다봤다가 바로 얼굴을 돌렸다. 뭔가 몰래 나쁜짓 했던걸 들킨 것 마냥 민망했다. 괜히 실내화 끝으로 바닥을 찼다.

[...알고 있었으면 장소를 좀 다른데로 옮기지 그래요]
[하하 그건 내 맘이고]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슬쩍 노려보니 여전히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건지 생글생글. 뭐 고백받은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일이 없긴 한가? 아직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는 송태섭은 알 길이 없었다.  
고백을 몰래 훔쳐보던 것도 다 들킨 마당에 궁금한거라도 물어보자는 심산으로

[형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툭 내뱉듯 물었다. 예상치못한 질문이었는지 대만은 아무말 없이 태섭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크게 두번 깜빡였다. 

[니가 알아서 뭐하게?]
[그냥요. 궁금해서]

진짜 궁금한건 맞으니까.

[어, 있어]

짧고 간결하고 명확한 대답이었다. 태섭의 눈을 바라보는 대만의 눈빛은 또렷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잔해가 달그락 거리며 심장을 긁어 생채기를 만들어간다. 아프다. 
그게 누군데요? 라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씹어삼켰다.  듣고 싶지만 듣기싫었다. 정확히는 무서웠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듯 흐응 그렇구나.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소각장까지 이 엉아가 같이 가주마!]

태섭의 목에 팔을 둘러오며 장난스레 무슨 선심쓰듯 말했다. 아 뭐래는거야. 팔을 내치려고 했지만 대만이 팔에 힘을 주어 버텼다. 희미하게 땀냄새가 섞인 섬유유연제의 상쾌한 향기가 태섭의 후각을 쓰다듬었다.

[쫌 가만 있어봐~ 태섭이 너 피부가 차가워서 이런 날 안고 있기 딱 좋단 말이야] 
[사람을 멋대로 죽부인 취급하지 마시죠? 난 덥다고요.]

진짜 덥다. 
맞닿은 살갗이 뜨겁다고 느끼는 것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분명 다 이 빌어먹을 더운 날씨 때문이다.  라고 책임 전가를 하며.
날뛰려는 심장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속으로 구구단을 외면서 진정 시키느라 머리에서 김이 날 것 같다.
너무 덥다.


〇●〇●〇


『초등학생?』

그게 첫 만남이었다.
준섭형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송태섭의 농구를 봐주었던 사람. 
짧은 1on1에서 준섭형과 겹쳐보였던 사람.
당황해서 말 없이 돌아가려는 태섭에게 또 보자고 해준 사람.
그 날 이후에도 그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다가 딱 한 번 더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아니 만났다기보다는 길가다가 그가 친구들과 농구를 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눈에 띄기 싫어서 입고 있던 후드티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그늘진 곳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무척 즐거워보였다. 플레이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정말 태양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뭣도 모르고 함부로 쳐다보았다간 눈이 타들어가버릴정도로 강렬한. 송태섭 자신과는 정말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가 살짝 뒷걸음을 치며 뛰어올랐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농구공을 쏴 올리는 유연한 손목의 움직임부터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농구공까지 일련의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송태섭의 머릿속에 각인 되었다. 그 나이 되어서 처음으로 '아름답다' 라는 형용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된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철조망을 움켜쥐고 넋놓고 쳐다보았다. 농구공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냅다 뛰었다. 심장도 함께 쿵쿵 뛰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틈만 나면 그가 떠올랐고 그 때마다 심장이 팔딱거렸다. 어린 마음에 혹시 심장에 병이 있는게 아닐까 남몰래 걱정도 했다. 
그 걱정은 한참 후에 해결 되었다. 같은 반에서 친해진 달재에게 슬쩍 물어보니 깜짝 놀라며 『태섭아 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니?』라는 대답에 태섭은 더 놀랐다. 좋아하는 사람...속으로 되뇌이자 또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 날 처음으로 몽정이란 걸 했다.  심장병 걱정(?)이 해결되고 나니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〇●〇●〇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저 인간 자석의 희생자였어! 아니다 최대 피해자 아닌가? 뜬금없이 떠오른 과거의 주마등에 발끈하여 송태섭은 칫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분노의 양치질을 했다.

한여름이어도 새벽은 좀 선선한 편이었다.
아침에 눈이 일찍 떠진 김에 후딱 준비해서 일찍 집을 나섰다.  아직 밤의 장막이 채 다 걷히지 않은 길을 걸었다. 평소 역으로 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윽고 철제 펜스가 둘러쳐진 농구 코트가 나타났다.  걸음을 멈추고 철조망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 때와 같은 위치 다른 높이. 철조망 너머 코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슛을 쏘는 정대만의 모습이 그려진다. 동작 하나하나가 아주 선명하게. 어렸을 적 기억과 다른 점이라면 슛을 성공한 정대만은 송태섭을 보며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가슴을 부딪혀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이 철조망 밖에 서있는데.
태섭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 때처럼 냅다 달려서 도망칠 것인지. 이 철조망을 끊어버리고 저 코트로 달려들어갈 것인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스스로가 감당해야한다는 것을 송태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걸음을 옮겼다.






Posted by Bernar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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