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유난히 추웠다. 오전엔 맑았던 하늘은 어느샌가 몰려든 구름들로 잿빛 물감을 제멋대로 짓이겨 칠한 듯 얼룩덜룩 무겁고 축축해보였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문 너머의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섭은 슬쩍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흘렸다.
김이 올라오는 머그컵을 만지작 거리며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던 남자-한 살 연상의 연인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눈...내리겠네]
[아ㅡ 눈 싫은데]
창문을 향해있던 고개를 돌려 태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살짝 웃었다. 맞다 너 눈 싫어했지.네네 누구 덕분에요. 하하 야 난 그 때 눈 내리는거 보지도 못했어. ...흥.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연인을 노려보면서도 참 단정하게 잘생겼다며 새삼 감탄하는 자신의 팔불출스러움을 속으로 욕하면서도, 저 웃음 속에 숨어있는 위화감 또한 놓치지 않았다.
웃을 때의 눈썹의 모양, 눈매의 움직임, 입꼬리 모양, 뺨의 떨림, 웃음 소리...평소와 얼핏 비슷했지만 무엇 하나 같지 않았다. 눈 앞의 이 남자는 왜 내가 모르는 얼굴로 웃고 있는거지?
저도 모르게 눈썹 꼬리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가 지끈 거린다.
며칠 전 수개월만에 공항에서 재회했을 때는 태섭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모습 그대로 였다. 흔들리던 손도 살짝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도 어깨를 감싸안는 두 팔의 온기도.
뒤엉키는 두개의 호흡속에 바르르 떨리는 눈썹도 모두 사랑하는 연인의 그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막연하게 느낀 위화감이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낸 건 어제였다.
.
.
[여기 옆에 누워봐 태섭아.]
침대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때리는 대만을 보며 태섭은 손에 들고 있던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곁으로 다가왔다.
[뭔데. 지금 유혹하는거에요?]
[아니거든. 머리 다 말렸으면 이리와]
어깨를 으쓱하며 시키는 대로 얌전히 대만의 팔을 베고 옆에 눕자 뒤에서 나머지 한 쪽 팔이 다가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천천히 밀착해오는 낯익은 체온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대만의 팔에 제 팔을 감았다. 샴푸 향과 바디 로션 향에 서로의 살내음이 섞여 가슴 속을 따뜻하게 채워간다. 목덜미 뒷쪽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 목을 살짝 움츠렸다. 대만은 그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는 올라가 방금 드라이를 해서 보송한 곱슬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세팅하지 않은 태섭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가늘고 부드럽다. 간지러웠는지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섭아. 송태섭]
[네.왜요]
[태섭아.... 태섭아]
몇 번이고 계속 품안의 연인의 이름을 불러댄다. 정수리 위에서 움직이는 턱과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몇 번이고 반복되는 자신의 이름의 울림이 낯간지러워진 태섭은 겹친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왜 이러실까. 뭐 할말 있어요?]
[...그냥]
그냥 지금이 너무 좋아서..들릴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다시 한 번 태섭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러질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지럽다. 밀착된 체온의 따뜻함과 나른한 분위기에 슬며시 다가오는 수마를 어금니를 질근 깨물어 쫓아냈다. 좀 더 지금에 젖어 있고 싶었다. 등 뒤의 연인도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계속 이대로였으면 좋겠다..]
[가능한한 빨리 다시 들어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요]
태섭은 이틀 후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보름 정도 좀 긴 휴가였는데도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가족과 보낸 하루를 제외하고는 쭉 정대만과 함께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턱없이 부족했다. 상심한 연인을 조금이라도 달래려고 자신을 껴안고 있는 손을 쓰다듬었다. 어라? 원래 체온이 높은 사람인데 이상하리만치 손 끝이 차갑다.
[형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
대만은 아무 답도 없었다. 얼마간의 침묵을 깬 것은 등 뒤에서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흐트러진 숨소리였다. 훌쩍이며 몸을 떠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순식간에 피어난 불안과 초조함이 좀 전까지 달달했던 기분을 밀어내고 심장을 뒤흔들었다.
[잠깐, 지금 울어요?]
몸을 틀어 뒤돌아보려고 했지만 대만이 팔에 힘을 꽉 주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형 이 팔 풀어봐요. 왜 우는데. ...이대로 있...어... 흐흑, 나 보지마. 흐느낌 섞인 목소리가 불안한 심장을 세차게 때린다.
마주보고 달래주고 싶은데 당사자가 허락해주지 않으니 그가 왜 우는 지는 커녕 얼굴 조차 볼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또 당분간 곁을 떠나있게 될 것이 슬퍼서인가 아니면ㅡ. 며칠동안 대만과 함께 지내면서 느꼈던 작은 낯설음이 떠올랐다. 대소롭지 않게 넘기려면 넘길 수도 있는 별것 아닌 행동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본다거나 같이 걷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뻔 한 것을 잡아 준 것도 여러번이었다. 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요? 하하 그러게 말이다. 멋쩍게 웃으며 얼버무리던 얼굴에 서려있던 옅은 긴장감이라든가.
좀 의아했지만 간만에 재회한 연인과의 시간에 괜한 잡음을 섞고 싶지 않아 그냥 넘겨버렸었던 몇몇 장면들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렇다 한들 지금 대만이 울고 있는 이유와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태섭은 알 길이 없었다.
등 뒤에서 계속 되는 흐느끼는 소리에 이 쪽까지 콧날이 시큰해졌다. 등 뒤에서 어깨를 들썩이는 감촉이 전해질 때마다 입 속이 바싹바싹 말라들어갔다. 심장이 욱씬거려 아랫 입술을 꼭 깨물며 손을 뻗어 대만의 짧게 친 머리를 토닥였다.
[형, 울지 마요. 울지마]
나직하게 연인을 달랬다. 좀처럼 울음이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안되겠다싶어 억지로 몸을 틀어 마주보았다. 눈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보이기 싫은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는 걸 저지하곤 안볼게요. 속삭이며 대만의 머리를 폭 끌어안았다.
[그만 울어요, 나까지 눈물 날라 그러네]
[....미안]
천천히 대만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들썩이던 어깨가 잠잠해졌을 때는 커튼 구석이 희끄므레한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품 속 남자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태섭은 밀려드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커튼 사이로 비쳐든 햇살에 잠에서 깨어났을 땐 침대 위에 태섭 혼자 였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리를 긁적이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베란다 창가에 서있는 대만이 보였다. 이쪽의 인기척을 못느낄 정도로 또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다. 일부러 발소리를 낮춰 조용히 곁으로 다가갔다. 창에 비친 그의 단정한 옆모습이 어딘가 좀 창백해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사람이 옆에 온 거도 모르고. 요며칠 계속 그러네.]
[아, 미안. 일어났냐.]
물음의 답을 인사말로 흘려버리는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섭은 말을 이었다 .
[눈 부었어요]
[아ㅡ어쩐지 눈꺼풀이 무겁더라. ]
[...괜찮아요?]
[어? ...어]
대만은 난처한 듯 웃더니 나 먼저 씻을게. 점심은 나가서 먹자. 라며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참 속을 못숨기는 사람이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대체 저 속에 뭐가 들어있는건지. 어제의 일을 떠올리자 가슴 한켠이 시큰해졌다. 태섭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꾸욱 눌러 문질렀다.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걸 끄집어내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잠부족으로 희끄무레한 머릿속을 쥐어짜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
.
[태섭아]
[.....아 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지금으로 의식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으로 이 쪽을 응시하는 시선을 태연한 척 맞받았다.
아주 잠시간 마주보다가 대만은 옆 소파에 걸쳐둔 코트를 집어들며 말을 이었다.
[좀 걸을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코트에 팔을 꿰어넣었다.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대만의 뒷모습을 쫒다가 이내 태섭도 자켓과 머플러를 들고 뒤따랐다. 카페를 나서자 몸을 감싸고 있던 실내의 온기는 눅눅한 겨울 바람에 한순간에 날아가버렸다. 날숨에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태섭은 반걸음 정도 떨어져 앞서가는 묵묵한 등을 보며 걸었다. 사람이 북적대는 카페 거리를 지나 공원 깊숙히 인적이 드문 다다르자 대만은 걸음을 멈추었다. 등지고 선채로 한 번 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그만하자.]
[...무슨 소리에요 갑자기.]
[헤어지자]
아 왜 항상 좋지 않는 예감은 맞아떨어지는 걸까. 징크스란 놈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수일간에 걸쳐 쌓인 위화감과 어색한 태도 생소한 표정 뒤에 가려져있는 판도라의 상자의 정체는 예상한대로 였다.
하지만 정대만이 대체 무슨 이유로,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그럴수 밖에 없잖아. 분명 둘의 애정 전선에 이렇다 할만한 문제는 없었으니까.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의 롱디였지만 매일 짧게라도 통화를 했고 어떻게 쥐어짜도 시간이 되지 않는 날은 이메일을 썼다. 그 날의 날씨부터 있었던 일, 힘들었던 일, 화났던 일, 즐거웠던 일, 뭘 먹었는지 어딜 갔었는지, 하고 싶은 말, 아픈데는 없어요? 무릎은 괜찮고? 밥 잘 챙겨먹어요. 응 나도 보고 싶어요. 잘자요. 내 꿈에도 좀 나오고 그래요. 보고싶다.
손에 닿는 온기는 없을지언정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그 날의 감정부터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주고 받았다. 타지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전화로 투정을 받아주는 연인의 목소리가 탄탄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대만에게도 자신이 그런 존재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는데. 전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우뚝 선 등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울컥 치밀어올라 태섭은 목소리를 높였다.
[형!]
[나 결혼할거야.]
[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사업 물려받으려고.]
그런 얘기 지금껏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태섭은 좀 벙찐 기분이 되었다. 대만의 집안이 꽤 큰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었지만 특별히 집안이나 사업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업을 물려받겠다고? 그래서 결혼을 할거라고? 농구는? 그 말을 믿으라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대만? 태섭은 머릿속에 쏟아져나오는 말들을 꾹 누르고 훅 숨을 내뱉았다. 목젖에 쎄한 통증이 어렸다 .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믿고 안믿고는 니 자유야.]
정대만 얼굴보고 얘기해! 대만의 팔을 잡아 거칠게 돌려세웠다. 어금니를 꾸욱 깨물며 마주한 대만의 시선에 .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소름돋을만큼 고요한 눈빛은 하지만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하고 있었다. 일절의 감정을 배제한 그 눈동자는 매우 단호했다. 니가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어,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대만은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억양 없는 단조로운 어투로 재차 내뱉았다.
[분명한 건 더 이상 내 옆자리는 니 자리가 아니란거야]
경직된 목구멍을 긁으며 기어올라온 목소리는 [왜 그러는데........] 라고 한마디를 겨우 짜내고는 흩어졌다. 뭔가 말해야해. 뭐냐고 그런거 납득 못한다고 6년간의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은 대체 너한테 뭐였냐고 대들어 따지든 가지 말라고 붙들든 뭐든 해야한다고 속으로 자신을 채찍질 했지만 뱀 앞에 놓인 개구리 마냥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고막을 쿵쿵 울렸다.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들어 붙들려고 했지만 닿지 않았다. 늘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서커먼 공허만이 존재했다.
[그러지 마요 형......]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가느다랗게 갈라진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간절한 그 목소리에 대만의 표정이 아주 잠깐 일그러지는 듯 했으나 이내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대만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건강해라]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멀어지는 대만의 뒷모습을 태섭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쭉 계속 될거라 생각했던 6년의 시간이 돌연 납득할 수 없는 끝을 맞이한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상실감과 당혹감 그리고 의문이 뒤엉켜 가슴을 짓눌렀다.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여러 차례 기침을 해댔더니 목구멍이 따갑고 쓰렸다.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허덕대고 있자니 문득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고개를 들자 잿빛 하늘에서 하얀 결정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지럽게 난무하는 하얀 장막이 저 멀리 작아진 뒷모습을 완전히 감추어버렸다. 눈 앞의 허공을 하얗게 수놓는 눈에 시선을 던지며 엉망진창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한마디를 태섭은 내뱉듯이 읊조렸다.
[진짜.. 쓰레기 같네]
.
.
.
저벅저벅.
대만은 도망치듯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태섭에게서 멀어져갔다. 머릿속은 백짓장마냥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그저 어서 그 곳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심장이 된것 마냥 쿵쾅쿵쾅 날뛰는 심박동에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꽉 주어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앞으로 나아갔다.
헤어지자 헤어지자 헤어지자 헤어지자 울면서 수백번 연습했던 이별의 대사를 제대로 연기해냈나? 한 자 한 자 내뱉을 때마다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은 오른손에 힘을 꾸욱 주었다. 그 자리에서 울어버리면 안되니까.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핏기가 가실만큼 강하게 주먹쥔 손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태섭의 시야에서 완벽하게 사라졌을 때 쯤 대만은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짧게 내뱉음과 동시에 급격하게 올라오는 구토감을 느끼고 근처에 있던 공원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들어갔다.
흐린 날씨 탓에 화장실 실내는 어두컴컴했지만 개의치 않고 화장실 칸 문을 열어젖히고 변기 앞에 주저앉았다.
안의 내장까지 다 토해낼 기세로 구역질을 계속 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에 올라오는 건 위액 뿐이었는데도 그냥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정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가 수천번 수만번 생각해봤지만 결국은 매번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함이 혐오스러웠다. 계속 위액을 토해낸 탓에 입안이 시큼하다못해 쓰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변기에서 떨어져 벽에 기대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오른손을 꺼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손이 빨갛게 젖어있었다. 그제서야 통증이 밀려오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일생 일대의 연기를 위해 준비했던 가면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깨지며 바닥에 흩어졌다.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ㅡ라는 사실이 심장을 마구 난폭하게 후벼팠다. 만신창이가 된 심장에서 철철 흘러넘치는 선혈이 눈물이 되어 끊임없이 쏟아져내렸다. 피투성이의 오른손도 눈물에 가려 벌거스름한 색채만 남기고 흐릿하게 녹아버린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녹아서 흐믈하게 보이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봤던 태섭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보인다. 바짝 굳은체 크게 벌어진 눈동자로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던 그의 얼굴이 지긋이 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갖다 붙인듯한 이유로는 납득하지 못하겠지. 태섭이라면 아마 거짓말이라는 건 바로 알아챘을거다. 하지만 결단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기에 마음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가면을 뒤집어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표정 짓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대만은 몸을 웅크린 채 몇 번이고 사죄의 말을 반복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태섭아.
있는 힘껏 날 원망하고 그리고 깨끗하게 잊어.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해라.
안녕.
.
.
.
그 날은 어떻게 숙소까지 도달했는지 모른다. 신발도 벗는 둥 마는 둥 침대에 쓰러져 그대로 죽은 듯 잠들어 태섭이 눈을 뜬 건 이튿날 정오쯤이었다. 바짝 마른 목구멍이 갈증으로 쓰라리고 머리는 깨질듯이 아팠다. 태섭은 머리를 움켜쥐고 겨우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대며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 속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자 갈증은 어느정도 해소되었지만 여전히 불쾌한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벽에 기대어 길게 심호흡을 여러번 했다. 두통이 좀 가라앉으면서 차츰 냉정함이 돌아왔다. 눈을 감고 어제의 일을 반추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이별 선고. 결혼이니 사업을 물려받느니 전부 적당히 갖다붙인 핑계라는 거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해도 직접 본인의 입으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역시 가볍지 않았고 게다가 그 때 그의 눈빛은...태섭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무섭다...고 느꼈다. 그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당장 떠나라고 견고한 벽이 으르렁대고 있었다. 웬만한 일은 허허 웃으며 원만하게 넘기고 받아들이던 남자를 대체 무엇이 그렇게까지 몰아세우고 있는 것인가. 그 무언가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대로 납득할 태섭이 아니었다. 코치에게 전화를 걸어 일주일 더 있다 갈거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뭐라뭐라 얘기하는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놨다. 그리고 욕실로 향했다. 일단 정대만을 만나자.
.
[대만이라면 며칠 전에 관뒀다뿅]
[하? 왜 그걸 이제 얘기해요?!]
대만이 속해있는 농구팀으로 찾아가서 팀메이트인 이명헌에게 대만에 대해 물어봤다가 돌아온 대답에 발끈하며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명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태섭의 손을 뿌리쳤다. 태섭과 명헌은 서로의 연인에 대한 현황을 교환하는, 말하자면 거래 관계였다.
[내 친구는 니가 아니라 대만이다뿅]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태섭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홱 돌렸다.
[대만이가 절대 너한테 얘기하지 말래서 그랬을 뿐이야]
[......]
[그리고... 지금은 나도 걔 어디있는지 알고 싶다]
한숨을 푹 쉬며 코트로 돌아가는 명헌을 보며 태섭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초조함이 마음을 휘저었다.
공통 지인, 농구쪽의 지인, 지인의 지인 등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맥을 동원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수소문도 해봤지만 모른다. 나도 놀랐다. 라는 대답뿐이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찾아간 흥신소 역시 가는 곳 마다 고개를 가로로 저을 뿐이었다. 의뢰를 받을 수 없단다. 정대만의 집안이 어느 정도 재력과 권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단서 한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헤어지자 한마디만 남긴채 완벽하게 자취를 감춰버린 그 남자의 이름을 그저 속으로 되뇌이는 것 밖에 지금의 태섭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정대만이 사라졌다.
.
터덜터덜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와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냥 여기를 벗어나 모두 다 잊고 농구에 전념하고 싶었다. 그저 며칠 사이에 박살난 멘탈 회복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싶었다. 살기 위해서.
짐싸기에 집중하다가 침대 옆 테이블에 놓여있는 반지를 발견하였다. 사귄지 1000일이 되던 날 태섭이 대만에게 선물했던 커플링이었다. 옆에 하얀 메모지가 함께 놓여있었다.
돌려줄게
짧은 메세지가 가슴을 쿵 밟고 지나갔다. 순간 울컥 치밀어 태섭은 반지를 집어던지려고 했지만 차마 던질수 없었다. 그저 손안의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정말 이대로 끝인가ㅡ 애써 외면했던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제서야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상실 당혹 분노 슬픔 허탈 초조 후회 그리움 온갓 감정이 뒤범벅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은 흐느낌이 되고 이윽고,
[왜 나 버려요..]
답이 돌아올리 없는 물음을 허공에 던지며 태섭은 주저 앉아 오열했다.
창밖에는 며칠째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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